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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 전쟁과 페타르 3세의 개혁 === 1854년부터 1856년까지의 서부 전쟁은 제정 군대의 낙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농노 징집병들은 구식 머스킷으로 라 마베라군의 강선 소총과 맞섰고, 철도가 없어 증원군은 몇 달씩 걸어서 전선에 도착했다. 미하일로 2세가 전쟁 중인 1855년 죽고, 즉위한 페타르 3세(1855~1881)는 1856년 벨라 강 조약으로 강화하며 벨라 강 서안의 일부를 라 마베라에 넘겨주었다. 패배는 페타르 3세를 개혁으로 몰아갔다. 1858년 그는 국장과 국기를 정비하는 문장 개혁을 단행해 대형·중형·소형 국장과 차르기를 정했고, 1859년 국영 병기창 칙령을 내려 크라슬리스크에 국영 병기창을 세웠다. 병기창과 광산, 철도에는 국가 농노를 배속해 일하게 했다. 1861년에는 크라슬리스크 공과학교를 세웠고, 1862년에는 해군을 보내 [[청평]] 남부의 항구 푹하이를 99년 기한으로 조차했다. 1868년 인터그라드와 인크론슈타트를 잇는 첫 철도가 개통되었고, 1872년에는 [[루이나]] 은행단에게서 첫 차관을 들여와 철도 건설을 넓혔다. 그러나 페타르 3세의 개혁은 농노제 앞에서 멈추었다. 1866년 그는 국가 농노와 영주 농노를 단계적으로 해방하는 칙령안을 마련해 통치평의회에 올렸지만, 대귀족 평의원들은 이듬해 1867년 이를 압도적으로 부결했다. 땅만이 아니라 물까지 쥔 영주들에게 해방은 영지의 붕괴를 뜻했다. 차르는 칙령을 강행하지 않고 철회했고, 이후 개혁은 군대와 산업에만 머물렀다. 1872년 소설가 밀로반 디미치가 수문을 쥔 영주에게 물을 빼앗긴 농노 가족의 몰락을 그린 《물길》을 펴내자 정부는 석 달 만에 이를 금서로 만들고 디미치를 고원으로 유배했다. 해방이 좌절되자 지식인 청년들은 지하로 들어갔다. 1870년대 인민주의 지하 조직 '평원의 의지'가 결성되어 농촌 계몽과 테러를 병행했고, 1881년 3월 페타르 3세는 인터그라드 운하 다리 위에서 이 조직이 던진 폭탄에 맞아 숨졌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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